야곱은 일생에 세개의 기둥과 하나의 망대를 체험했다(창35:21). 기둥의 세 장소는 갈르엣, 벧엘,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 세웠습니다. 야곱이 세운 세 기둥은 그의 일생에 나타난 이정표였습니다.
세 기둥
갈르엣의 기둥
첫째 부분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체험하였습니다. 20년간 라반과 함께하였던 야곱은 어떻게 라반을 떠났습니까? 그는 영광스럽게 떠나지 않았습니다. 라반은 몰래 도주한 야곱을 추격하여 갈르엣에서 야곱과 만났을 때 협상을 하며, "이제 오늘 너와 내가 언약을 세워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창31:45)라고말했습니다. 라반은 돌더미를 쌓고자 했지만 야곱은 기둥을 세웠습니다. 야곱은 라반과 타협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 기둥을 세웠습니다. 이 기둥은 야곱의 존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의 첫 단계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체험하는 단계입니다.
벧엘의 기둥
야곱은 밧단 아람을 떠나 좋은 땅으로 돌아온 후 바로 벧엘로 가지 않았습니다. 창35:1에서 하나님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심으로 개입하여 그를 벧엘로 부르셔야 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이십 년 전에, 벧엘에서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이행할 뜻이 전혀 없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는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직접 벧엘로 여행하지 않고 속곳으로 여행하였고, 자신을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짐승을 위하여 우리를 만들었습니다(창33:17). 후에 세겜으로 여행하였고, 그곳에서 땅을 사서 그의 장막을 쳤습니다(창33:18). 이어 야곱의 딸 디나의 더럽혀짐에 심각한 문제가 일어난 후,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고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에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에서를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그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께 단을 쌓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의 집 벧엘을 가지시려는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였습니다. 여기 벧엘에서 야곱은 둘째 기둥, 그의 인생의 두 번째 이정표를 세웠습니다(창35:14). 창28:22이 가리키는 대로 벧엘의 그 기둥은 하나님의 집이라 불리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첫째 기둥은 하나님의 돌보심의 간증이요, 둘째 기둥은 하나님의 집의 간증이었습니다.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의 기둥
창35:16-20에서 야곱은 벧엘에서 제단을 쌓았고 기둥을 세웠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답했을 뿐만 아니라 벧엘을 얻으려는 그분의 갈망을 성취하시도록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일생은 창35:15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16절에서 야곱은 여행을 계속하였을 때, 기쁨과 고통이 겹치는 한가지, 얻음과 잃음에 관한 한 문제를 체험하였습니다. 비록 야곱에게 열 한 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그리스도의 온전한 예표가 아닙니다. 그에게는 많은 체험이 있었지만 그것들 중 어느 것도 그리스도를 낳기에 적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라헬을 붙들어 두느냐, 아니면 베냐민을 얻는야의 선택에 직면하였습니다. 야곱은 라헬이 둘째 아들을 출산할 때에 기뻐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그의 마음의 희망인 라헬이 죽어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베냐민은 오고 있었지만 라헬은 떠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의 천연적인 선택의 잃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일생에 나타난 셋째 기둥은, 하나님이 그의 천연적인 선택을 다루심에 대한 간증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간증과 하나님의 집의 간증을 갖는 것은 놀랍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까지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표현은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집 안에 있는 단체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표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표현하려면 반드시 교회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의 기둥과 하나님의 집의 기둥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단체적인 표현을 위한 기둥인 셋째 기둥이 있어야 합니다. 이 기둥은 댓가를 요구합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베냐민이 필요합니다. 베냐민이 태어나려면 우리의 천연적인 선택인 우리의 라헬은 죽어야 합니다.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우리 또한 천연적인 선택이 묻혀진 곳인 라헬의 묘에 셋째 기둥의 이정표를 가져야 합니다. 이 기둥은 우리의 천연적인 선택과 우리의 마음의 원함의 죽음과 장사를 뜻하는 간판입니다.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의 기둥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리스도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천연적인 선택과 천연적인 원함과 천연적인 생명을 값으로 요구할 것입니다. 첫째 기둥에서도 둘째 기둥에서는 죽음과 무덤을 보지 못합니다. 오직 셋째 기둥에서 라헬의 죽음과 그 무덤을 봅니다. 라헬의 무덤 위에 세워진 기둥(묘비)은 베들레험으로 가는 길에 있었습니다. 그곳에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리스도의 표현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표요 하나님의 간증입니다.
한 개의 망대
창35:21에서 "야곱은 셋째 기둥을 세운 후, 발행하여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에델(Eder)은 '양떼'를 의미합니다. 미가서 4장 8절에서 말씀하신 망대에서, 더럽히고 수치스럽고 부도덕한 일이 야곱에게 일어났습니다. 그의 아들 르우벤이 야곱의 첩과 더불어 간음을 범하였습니다. 이것은 기둥 아닌 망대에서 일어났습니다. 에델의 망대, 양떼의 망대는 생활의 안일함을 암시합니다. 야곱은 많은 양떼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에델 망대를 지날 때 그곳을 쉬기 좋은 곳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의 목적지인 헤브론으로 나아가는 대신 그는 에델 망대 옆에 머물렀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편안한 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곳에 이르렀었음을 암시합니다. 죄, 특히 간음죄는 항상 우리가 편안할 때 들어옵니다. 야곱은 그곳에 머물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당신이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항상 당신을 함정에 빠뜨릴 망대가 근처에 있을 것입니다. 이 덫을 피하는 길은 멈추지 않거나 그것을 바라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에델 망대 옆에 당신의 장막을 치지 말고 그것을 지나쳐야 합니다. 생활의 안일함은 항상 주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유혹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자는 그의 최종 목적지가 멀다고 인식합니다. 여행이 너무 길기 때문에 쉴 곳을 찾기를 기대합니다. 그것은 올무입니다. 그것을 통과하여 전진하십시오. 루우벤은 더럽힘으로 인하여 장자권을 잃었으며 요셉은 그의 순결함으로 인하여 장자권을 얻었습니다(창39:7-1:2, 49:3-4). 야곱의 傳記는 바로 우리의 歷史입니다. 우리 역시 세 개의 기둥과 한 개의 망대를 체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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